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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미디어 연속체의 신체적 수행성 

2023

이 글은 2023 정치이론세미나01_주디스 버틀러의 윤리-정치의 참여 결과물이자 작업’수치심에 의해 인용된 동작들’의 작업 기반이 된 에세이이다. 




“그 이미지들은 전리품 아니면 전쟁의 목표물이다.” - 위태로운 삷, 206p

“그렇다면 동시대 정치 안에서 출현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아울러 우리는 미디어에 의존하지 않고 이런 질문을 고려해볼 수 있기나 한 걸까?” - 연대하는 신체들과 거리의 정치 126p 


버틀러 읽기에서 나는 수행적 이미지란 무엇이 될 수 있는가? 혹은 정치적 예술 실천의 수행적 매체와 방법은 어떤 형태로 나타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던졌었다. 이 글에서 나는 버틀러의 수행적 발화 및 행위의 ‘상연’에 관여하는 이미지-미디어를 하나의 연결된 단위로 논해 볼 것이다. 또한 이러한 이미지 미디어 연속체의 신체적 수행성을 발화효과적 수행문에 대한 참조를 통해 상상해 봄으로써 위 질문의 답인 수행적 예술 실천의 방식을 그려 보려 한다.

버틀러는 언어와 행위가 어떻게 수행적 성격을 가지며 나아가 그것이 어떻게 정치적인 것이 될 수 있는지를 말하는데, 이는 온갖 주체의 구성에 관여하는 권력의 재배치를 이끌어 내는 수행적 발화의 힘과 어쩌면 이 언어적 힘의 연장인 애도가능성의 평등한 분배를 취약성의 노출을 통해 주장해내는 신체적 수행성, 나아가 비폭력 저항의 윤리정치적 가능성에 대한 논의로 펼쳐진다. 또한 이 수행적 발화 및 행위가 ‘정치적인 것’으로 제안되는 논의의 곳곳에 구체적인 이미지 - 언론 지면이라는 특정한 물리적 공간에 새겨지지 못하는 얼굴 초상과 이름들1), 보도 사진 프레임 바깥에 존재하는 신체2)와 같은 것들이 있다. 이 음화된 이미지가(나타난 이미지로서 보다는 나타나지 못한 이미지로 제시된다는 면에서) 미디어의 ‘폐제와 표상’의 측면 모두를 드러낼 가능한 사례로 언급되고 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버틀러는 이미지와 관련된 정치적 논의에서 일반적으로 자주 거론되는 주제인 배제된 주체를 특정한 이미지로 바람직하게 재현할 수 있다던가 해야한다라고 주장하지 않고 더불어 이런 논의를 뒷받침할 시각 언어로서의 이미지가 담론과 현실 사이를 순환하는 수행성에 대해 설명하지도 않는다. 그럼 버틀러의 수행성 논의에서의 이미지의 위치, 특히 윤리 정치학을 다루는 후기 저작들 속에서 이미지와 미디어의 자리를 어디로 점찍어 볼 수 있을까? 

이 질문을 진전시키기 위해 우선 수행성(performativity)이라는 단어 자체에 포함된 상연의 의미(perform)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수행문(performative)이라는 단어는 존 L.오스틴이 사태를 진술하는 진위문(constative)과 구분되는 그 자체로 행위성을 가지는 발화를 개념화하기 위해 고안한 것이었다. 단어의 형태에도 불구하고 오스틴은 예술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허구적 실천을 수행문 논의에서 제외시키려 했지만, 버틀러의 수행성에서 연극성3)은 중요하게 다뤄진다. “만일 젠더가 내부적으로 불연속적인 행위들을 통해서 제도화되는 것이라면, 본질의 외관은 바로 그 구성된 정체성, 즉 수행적 성과물이 된다. 배우 자신을 포함한 일상의 사회적 관객들은 이 수행적 성과물을 믿고 이를 믿음의 양식으로 수행하게 된다.”4)와 같은 설명에서 정체성의 수행은 연극 대본과 같은 이미 주어진 각본을 자신을 포함한 사회적 관객 앞에서 반복 즉, 재연 하는(reenactment) 과정에 비유된다. 따라서 버틀러의 수행성 개념을 ‘상연’, 즉 보여지는 것의 행위성을 제외하고 생각할 수는 없는 것 같다. 수행성 개념을 여러 분야에서 실천에 대한 물신적 태도를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하면서5), 수행성은 어떤 규범이나 권력의 억압에 저항하는 행위주체성의 실현 및 능동적 행위의 능력으로 믿어지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수행적 행위는 ‘상연’이며, 허구성으로 보호되는 연극 무대에서조차 연기자의 행위는 단독의 의미나 효과를 가질 수 없고 언제나 보여지는 이들에게 행위의 효과 판단 및 의미화의 권한을 얼마간 이양해야 한다. 버틀러의 다른 많은 개념들처럼 이렇게 수행성은 능동적인 것 뿐 아니라 수동적인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러한 사유에는 내가 제기한 의문, 버틀러의 수행성 논의에서 이미지는 정확히 어디에 있는가?를 자동적으로 생성해내는 부분이 있다. 수행성이 상연의 의미를 품고 있다면, 그 보여짐의 순간 드러나는 신체의 취약성과 동시에 저항 가능성의 이미지 (혹은 그것이 표상된 미디어, 스틸/무빙 이미지라는 사물이자 어떤 측면에서 또 다른 신체인)에 대한 이야기는 어디에 있는가? 라는 것이다. 버틀러가 수행성 개념에서 언어와 신체적 행위에 집중하는 와중에 이미지를 구태여 따로 명확히 강조하지 않아도 수행성이라는 것이, 특히 집단적 신체의 수행성이 자기 구성적으로 성립하고 작동하는 과정의 어느 순간들에는 분명히 이미지가 발생한다. 왜냐하면 다시 말하지만 수행성은 보여지는 것, 어쩌면 행위하는 그 자신일 수도 있는 사회적 관객이 포함된 집단적 상황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미지를 발생시키거나 그것을 물리적으로 지지하고 이동시키는 무수한 장소들 역시 분명히 존재한다. 이것은 수행적 신체들을 다른 어디에선가 목격하게 만드는 매개 - 미디어의 표면일 수도 있고 그 신체적 수행을 육안으로 볼 수 있을 만큼 근거리에 위치하고 있던, 또는 그 행위하는 신체들의 일부였던 이들이 서로를 비추는 망막, 그리고 그것의 물리적 원본상인 현존하는 신체들이 사라진 후 남는 잔상일 수도, 이둘 모두가 합쳐진 거리에 나와있는 신체 행위의 연장으로서의 휴대용 미디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수행적 이미지 또는 정치적 이미지를 수행적 행위의 기록이나 재현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내가 보기에 버틀러는 이러한 주장에 회의적으로 반응할 것 같다. 모든 “인민이 거리에서 혹은 적어도 똑같은 거리에서 집회의 권리를 갖지 않을 때 그 어떤 군중 사진도 인민을 재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6) 재현 대상이 꼭 ‘인민’이 아니더라도 프레임 안의 표상이라는 것은 이미 그것을 포착하고 선별하는 관점에 의해 제한되는데, 확실히 버틀러는 이미지의 탄생 이전에 이 배제와 포함을 결정하는 힘을 논하는데 관심이 있어 보인다.7) 실제로 재현적 이미지는 분명 무언가를 보게 하고 보지 못하게 하는 권력이 작동하는 어떤 인식론적 한계 속에서 만들어지고 보여진다고 할 수도 있다. 버틀러는 <위태로운 삶>에서 뉴욕타임스 면을 장식한, 미군에 의해 해방을 맞이한 아프가니스탄 소녀들의 부르카를 벗어던진 의기양양한 맨얼굴에 대해 그 사진을 보는 “미국인은 말하자면 그런 얼굴을 볼 태세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고, 마침내 그 얼굴은 무엇보다 카메라를 향해서, 카메라를 위해서 드러난 것이다.”8), 라며 이미지의 재현불가능성을 말한다.

이러한 재현의 문제를 버틀러만 알아차린 것은 아닐 것이다. 히토 슈타이얼은 <스크린의 추방자들>에서 해방 및 주체성의 감각을 고조시키는 동일시의 대상으로서의 재현 이미지가 어떻게 불 가능해졌는지 역설하고 대신 사물로서의 이미지를 주장한다.9) 간단히 말해 나는 버틀러의 이미지를 둘러싼 논의를 슈타이얼의 이미지론을 참조하여 좀 더 용이하게 접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힘의 성좌가 얼어붙은 멍든 사물10)로서의 이미지는 취조의 대상이 되어, 누가 이미지를 만드는지, 그것이 어떻게 행위와 결합하는지, 그 이미지가 어떤 지면이나 미디어 기기의 표면 스크린을 할당받는지, 어떤 경로를 통해 전지구적 유통망의 흐름에 흘러들어가는지, 어떤 시청각적 아카이브의 일부가 되었는지와 같은 질문에 직면한다. 슈타이얼의 무빙이미지는 멀티스크린 설치를 통해 분절되고 버틀러가 지적한, 편집과 선별의 힘이 작동하는 프레임의 바깥은 실제로 ‘신체들이 걸어다니는 물리적 공간’이 된다.11) 슈타이얼의 이미지론은 이 모든 것을 통합해 논의 할 수 있는 일종의 ‘이미지 미디어 연속체(continuum)’를 상상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이것은 수행적 상연이 반드시 만들어내는 이미지들의 위치, 역할, 성격, 더 중요하게는 이미지 및 미디어의 전치가능성과 수행적 행위들과의 관계를 훨씬 용이하게 파악하게 해준다. 

슈타이얼은 이미지와 미디어의 정치에 대한 또는 정치적인 이미지와 미디어에 대한, 훌륭한 미학적 논평을 제공한다. 하지만 그의 사물로서의 이미지론은 집단적 신체의 수행성과 연결짓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제러미 델러의 <오그리브 투쟁>12)에 대한 글에서 그가 이 대규모 퍼포먼스에서 참여자들의 재연을 작품의 정치적 의미로 끌어들일 수 없다고 간주하는 듯 보인다는 점에서 이러한 의혹은 더 짙어진다.13) 따라서 슈타이얼의 객체 사물로서의 이미지 개념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대신 신체적 상연과 이미지 생산, 미디어 유통 등 어떤 단계에서든 그 모든 지점의 특성이 녹아들어 있는 대상으로서 이미지와 미디어의 연속체를 제안해 보려 한다. 이 글에서 이미지 미디어 연속체라는 단어는 그 자체로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이것은 슈타이얼의 이미지론이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 - 물질적 미디어와 이미지 - 을 참조하는 동시에 행위의 측면을 더 잘 설명하기 위해 임시 방편으로 선택한 이름이다 그렇다면 버틀러의 신체적 수행성의 상연을 인민과 출현의 장의 다공적 특성을 편성해낼 수 있는 민주적인 이미지 미디어14)는 어떤 것일 수 있을까? 이미지 미디어를 언론사의 방송 채널이나 미술관이라는 예외적 출현의 장소에 놓인 스크린, jpg 파일이나 16mm 필름과 같은 것만으로 상상할 필요는 없다. 위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이끌어내기 가장 편리한 이미지 미디어 연속체는 버틀러 역시 반복해 언급하는 ‘시위의 현장에서 휴대용 촬영기기를 손에 든 신체들’일 수 있다. 버틀러는 시위자를 위협하는 권력에 역으로 감시의 시선을 보내는 이 “ 높이 치켜든 휴대전화들” 이, 이것이 포착한 이미지가 “검열 형태들을 극복하는 바로 그 순간 전지구적인 미디어로서 출현의 장을 발생시키고 시위의 일 부가 된다”15)고 말한다. 하지만 버틀러가 “과연 신체적 행동은 그 기술과 분리될 수 있으며, 기술은 새로운 형태의 정치적 행동을 확립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일까?”16)라고 질문하고 있음에도 그의 관심은 전반적으로 기술이 실시간으로 현장의 신체가 되는 것에 있지, 역으로 현장의 신체가 기술로 흘러들어가는 방향에는 없는 듯 하다. 이처럼 미디어가 거리의 현장을 생중계할 때만 정치성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관점17)과는 다른 시각에서 이미지 미디어가 만들어내는 출현의 장에 대한 ‘전치가능성’의 범위를 보다 확장해 생각해 볼 수는 없을까?

올해 초에 나는 장애인 이동권 시위의 게릴라 시민 촬영 활동에 참여했었다. 시위 현장에 도착 했을 때 몇 가지 예상치 못한 상황을 목격했는데, 그 중 하나는 익명의 참여자들의 손에 들린 카메라였다. ‘게릴라 시민 촬영 활동에서 나는 이미지를 찍는 이들의 손에 지연되는 교통 상황의 불편을 감수해야만 하는 출근하는 시민들과(서울시와 교통공사측에 의해 이동권 시위자의 반대 ‘ 편’에 선 이들로 위치지어진) 똑같이 스마트폰 카메라가 들려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것이 얼마간 시위의 정당성을 음해하는 시의 전략인 시 민 사이의 적대를 무효화시키는 장면을 만들 것이라고 짐작했다. 하지만 나는 현장에서 미리 약속한 것이 아닌데도 얼굴과 이름을 아는 예술가들을 몇 명 마주쳤고, 그들을 포함해 모인 대다수 참여자들의 손에는 묵직한 DSLR이나  캠코더같은 전문가용 촬영장비가 들려있었다. 따라서 결과적으로 시위 현장에는 이미지 미디어의 측면에서 삼파전의 양상이 펼쳐졌다. 제복을 입은 경찰과 그 앞에서 신체의 취약성을 드러내는 장애인 시위자가 만들어내는 이미지와 그것을 향해 묵직한 카메라를 든 촬영 참여자들과(아마도 상당수 시각예술가이거나 영화 창작자들로 이루어졌을 듯한), 빼곡한 만원 지하철에서 이 모든 것을 맨 눈으로 바라보는 혹은 손 안에 든 스마트폰으로 여기 아닌 다른 곳의 장면을 바라보는 시민들이 그것이었다.

이것은 내가 시위의 현장이든 다른 어떤 신체적 수행성이 저항적으로 펼쳐지는 순간이든 현장의 수행적 상연에 관여하는 이미지와 미디어에 대해 논의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 개인적인 경험이었다. 또한 이것은 현장에서 생산된 이미지가 실시간으로 시위의 일부가 되는 것과는 다른 측면에서 이미지 미디어가 정치적 상황과 연루되는 경험이었다. 신체적 취약성을 포착할 미디어로서 내가 가지고 간 카메라는 원래의 계획과는 조금 다른 것에 가담한 것일 수 있다. 그때 현장에서 손에든 미디어에까지 연장된 신체적 상연은 이동권 시위에서 평일 출근 시간대라는 규범적 시간성을 수행하는 이들과 그러한 시간성에서 어긋난 자리에 존재하는 이들 각각의 취약성과 저항 가능성을 드러내고 있는 듯했다. 물론 이것은 원래의 시위가 미디어를 통해 출현시키고자 한 것 - 이동권을 제한당하는 신체 보다 - 중요한 것이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원래 목적한 구호 외 의 다른 것, 출현할 것이라 기대하지 못한 취약함을 노출시키는 것이 신체적 수행성의 효과라고 한다면 이것이 결국 취약성과 불안정성의 연대를 깨는 것이 아닌 이러한 연대를 보다 확장하는 길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미지 미디어의 이러한 발화효과적 수행성을 탐색하면서 버틀러가 언어적 수행성과 신체적 수행성을 교차시키면서 음성적 발화로 드러날 수 없는 어떤 초과적인 것의 드러남을 말하려 했던 것처럼18), 이미지, 행위, 미디어 모두가 연속적으로 결합된 이 단위의 위에 신체적 수행성의 언어를 교차시킬 때 무슨 일이 벌어질지 지켜볼 수 있다. 이러한 언어적 ‘접합’의 시도는 이것이 버틀러의 수행성 논의를 활용해 뭔가 새로운 예술적 실천의 방식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행해지는 것이 아니다. 신체적 수행성을 통해 우리 서로의 취약성과 상호의존성을 드러내고 정치적 출현의 장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이미지 미디어가 연루된 설명되지 않은 순간이 실제로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떤 표현이 이미지와 미디어의 폐제와 표상의 간격을 오가고 주체 및 출현의 장을 다공적으로 구성해내는 과정을 더 잘 포착할 수 있다면 그것을 쓰지 않고 아낄 이유가 없다. 행위로서의 이미지라거나 미디어 또한 신체라거나, (여기까지는 크게 낯선 표현들은 아니다.) 그래서 그것들이 역시 집단적 수행성과 취약성 상호의존성을 가진다는 문장을 일단은 써볼 수 있다. 취약한 미디어란 무엇일까? 이미지와 미디어가 마치 우리 모두처럼 상호의존적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신체적 수행성의 상연이 우리 모두의 삶다운 삶의 조건을 끌어낼 수 있다면 이미지 미디어의 삶다운 삶이란 무엇일까? 상호의존하는 우리의 스마트폰들, 평등한 사운드, 클라우드로 이동해 다시는 보여지지 않는 이미지들의 취약성, 미디어의 삶다운 삶. 버틀러는 통신망을 통한 가상적 삶의 유포로 애도 가능해지는 생명19)에 대해 논한다. 수행문은 모두 실패를 감수하고 발화되어진다. 버틀러의 수행성 논의를 참조한 정치적 이미지 미디어 역시 정확히 이러한 방식으로 시도되어야할 것이다.



1) 위태로운 삶, 66p “이라크 어린이 20만 명이 걸프 전쟁과 그 여파로 인해 사망했다 한들 개인으로나 집단으로나 우리는 그들 중 어느 누구의 삶에 대한 이미지나 사고 틀을 가지고 있기는 한가? 언론 매체에서 그들의 죽음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발견할 수 있을까? 그 아이들에게는 부여된 이름이 있는가?”
2) 연대하는 신체들과 거리의 정치, 239p “때로 인민은 혹은, 어떤 인민은 거리와 카메라의 시야에 딱 들어맞거나 시야에 부재하거나, 시야 바깥에 있다.”
3) 버틀러는 89년 글 “Performative Acts and Gender Constitution: An Essay in Phenomenology and Feminist Theory” 에서도 체현의 조건을 연극 공연의 조건과 비교하고 있다. 에리카 리히테 피셔는 이 부분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버틀러는 체현의 조건을 연극 공연의 조건과 비교한다. 연극 공연에서도 성별을 드러내고 성을 구분하는 행위가 일어나며 그런 성역할은 당연하게도 누군가에 의해 홀로 일어나지 않는다. 여기서는, 공유된 체험과 집단적 행위가 그 핵심이다.” 수행성의 미학 문학과지성사, 2017, 52p
4) 젠더트러블, 349p “어떤 의미에서 젠더가 행위란 말인가? 다른 관습적인 사회 드라마의 경우처럼 젠더의 행동은 반복된 연기를 필요로 한다 이러한 반복은 사회적으로 이미 설정된 일련의 의미들을 재실행하는 동시에 재경험하는 것이다.”
5) 조지훈, 수행성 이론은 어떻게 실천의 물신화를 피할 수 있는가, 문화연구 9권 1호, 2021, 6p “수행성 개념에 대한 몰이해는 실천에 의미부여를 강하게 하는 태도와 결합되면서 오히려 실천에 대한 개념적인 이해를 협소하게 만들고 수행성 개념을 특정한 사상가에 대한 찬반으로 환원한다는데 문제가 있다. 실천을 보다 세밀하게 이해하기 위해 등장한 개념이 실천의 물신화를 위한 개념으로 둔갑하고 있는 것이다.”
6) 연대하는 신체들과 거리의 정치, 238p
7) 위의 책, 238p “모든 사진, 아니 모든 일련의 이미지는 의심의 여지 없이 프레임 혹은 일련의 프레임을 갖고 있고, 그런 프레임은 잠재적으로 배제적인 지명으로 기능하면서 포착 불가능한 것의 지대를 수립함으로써 자신이 포착한 것을 포함한다.”
8) 위태로운 삶, 204p 
9) 스크린의 추방자들, 워크룸프레스, 2018, 40-80p의 빈곤한 이미지를 옹호하며, 당신이나 나같은 사물 참조
10) 위의 책, 73p “이러한 관점에서 사물은 결코 단순한 객체가 아니라 힘의 성좌가 굳어 저장된 화석이다.”
11) 미술관 안에서 관객들이 분절된 스크린 사이를 돌아다니는 풍경. 위의 책, 241p “우리는 절단된 부분을 재편집할 수 있다. 전체 국가 인구는 물론 경제적 생존력과 효용성 관념에 순응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잘리고 검열된 필름과 비디오의 모든 부분마저도 재편집할 수 있다. 우리는 이들을 비일관적이고 인공적이고 개안적인 정치적 신체로 편집할 수 있다”
12) https://www.youtube.com/watch?v=3ncrWxnxLjg 오그리브 투쟁은 1984년 영국에서 있었던 경찰과 광산 노동자들의 충돌 상황을 2001년 동일한 장소에서 반복 재연한 퍼포먼스 작업이다.
13) 진실의 색, 80-101p, ‘조심해, 이건 실제 상황이야! 다큐멘터리즘, 경험, 정치’에서 슈타이얼은 오그리브 투쟁의 정치적 재상연으로서의 공연 행위를 프레드릭 제임슨의 노스탤지어 개념으로, 정치적 불가능성을 반복하는 향수병적 몸짓이자 경험 경제로 편입된 스펙타클의 체험으로 설명한다. 이것은 레베카 슈나이더가 Performing Remains : Art and War in Times of Theatrical Reenactment(2011) 에서 남북전쟁 재연을 반복을 통한 역사의 비선형적 시간성과 몸의 만남으로 의미화하는 것과는 다소 차이가 있는 관점처럼 보인다.
14) 연대하는 신체들과 거리의 정치, 239p “좀 더 민주적인 프레임이란 그런 인민의 다공성이라는 특성을 편성해낼 수 있는 프레임일 것이다.”
15) 위의 책, 136-138p 
16) 위의 책, 136p 
17) 위의 책, 134p
18) 위의 책, 17-18p
19) 비폭력의 힘, 244p “요구자의 휴대전화 영상은 실제의 삶에 대한 가상 증거로서 요구자의 삶이 어떻게 삶의 가상적 유포에 의지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